잉태의 축복 속에 야마가타 만민교회가 세워졌어요
| Manmin News No. | 2006-05-08
주제규 집사
(일본 야마가타 만민교회. 재일본 대한민국 민단 야마가타현 본부 사무국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1995년 5월, 한밤중에 아내가 곤히 잠자던 나를 흔들어 깨웠습니다."여보, 나 좀 살려줘요. 죽을 것만 같아요!"
아내는 몸을 데굴데굴 구르며 고통스러워했습니다. 놀란 저는 구급차를 불러 병원 응급실에 갔는데 당시는 정확한 병명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당시 저는 야마가타현 민단본부에서 근무하고 있었는데 이틀 후에는 한국으로 출장을 가야 했기에 아내와 함께 한국행 비행기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6년 반 동안 주일(駐日) 한국 센다이 총영사관에서 근무하다가 야마가타현으로 근무지를 옮긴 지 한 달 반인 상태였기에 아내를 맡길만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내는 기내 밖으로 뛰어내리고 싶을 정도로 고통이 심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서울에 있는 언니 집에 머물며 병원에 가서 진단을 받았는데 난치병인 '진주종 중이염'이 악화되어 급히 수술해야 한다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이 병은 귀에서 고름이 나오고 잘 들리지 않으며, 심해지면 균이 귓속의 뼈까지 갉아 먹을 뿐만 아니라 균이 뇌에 들어가면 뇌종양으로 발전하는 무서운 병이었습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중이염을 앓아 온 아내는 이것으로 인해 항상 약을 복용해 왔으며, 귀에서 고름이 흘러나왔기에 냄새로 인하여 주변 사람들에게 폐를 끼칠까봐 항상 염려하였습니다.
이때 부산에 살고 계셨던 장모님이 첫 주간에 외손녀인 박혜상 집사의 전도로 본교회 2주 연속 특별부흥성회에 참석하셨다가 류머티즘성 관절염을 치료받는 체험을 하셨기에 이 소식을 듣고 "만민중앙교회 이재록 목사님께 가면 치료받을 수 있다." 라고 아내에게 권면하여 주셨습니다.
어릴 때부터 신앙생활을 했던 아내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병을 치료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2주 연속 특별부흥성회 둘째 주부터 언니인 최경희, 최남덕 권사님과 함께 만민중앙교회 예배에 참석을 했습니다.
그리고 예배 후에 이재록 목사님을 찾아뵙고 기도를 받았는데 기도받는 순간 몸 전체가 박하향 같이 시원해졌으며 동시에 심한 통증이 사라진 것을 체험했습니다.
그 다음 날부터 2주째 계속된 부흥성회에 참석하였는데 아내는 통회자복을 하면서 방언의 은사도 받았습니다. 그 후 귓속에서는 더 이상 진물이 흐르지 않았고, 두통과 여러 가지 후유증까지도 깨끗하게 치료를 받았습니다.
95년 6월, 일본에 돌아온 아내가 3주 후에 몸에 이상을 느끼고 병원에 갔는데 믿기 어려운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아기를 잉태했다는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91년 저와 결혼할 당시 몸이 약했던 아내였기에 가족들조차 아내에게 아기 가질 생각은 하지 말라고 권면할 정도였습니다.
94년, 결혼한 지 4년째가 되었지만 여전히 잉태의 기미가 보이질 않아 우리 부부는 병원에 가서 진단을 받았는데 의사는 아내가 선천적 심방결손으로 인한 심장병이라면서 아기를 가진다 할지라도 산모와 아이가 다 위험할 수 있으므로 심장 수술부터 해야 한다고 권면했습니다. 수술 후에는 몸이 너무 쇠약한 상태라 3, 4년 동안은 아이가 잉태되지도 않을 뿐더러 설사 잉태된다 할지라도 위험한 상태이므로 아예 출산은 생각도 하지 말라는 진단을 내렸습니다. 그 당시는 본교회를 알지 못하였기에 수술 후 3, 4년 뒤라도 잉태할 수 있으리라는 가능성을 바라보며 심장수술을 받았습니다.
당시 한국에서 돌아온 아내는 심장병 수술을 받은 지 8개월밖에 안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주의 종 이재록 목사님을 통해 보장받는 권능의 기도를 통해 난치병도 치료받았으며 잉태 축복도 받았으니 이 아기는 분명히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확신하였습니다.
그래서 아내는 믿음으로 아기를 낳겠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저는 한편으로는 조금은 불안하였지만 아내가 치료받은 것을 보았기에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자 하였습니다.
뱃속에 있던 아이는 새벽 5시만 되면 힘껏 발로 차서 엄마를 깨웠습니다. 아내는 아무리 피곤해도 그 시간이 되면 일어날 수밖에 없었지요.
아내가 일어나서 찬양하고 기도하면 그 때부터 뱃속이 평안해지곤 하였습니다. 그래서 아내는 새벽 5시가 되면 늘 일어나 기도를 하는 습관을 갖게 되었지요.
희귀병인 크레친 병에 걸려
아내는 96년 3월, 첫아들 시영이를 출산했습니다. 그런데 혈액검사 결과 크레친 병에 걸려 있다는 진단이 나왔습니다. 크레친 병이란 원인을 알 수 없는 '성장호르몬 생성 불능증'으로 몸에서 호르몬 생성이 불가능하여 평생 호로몬제을 복용하지 않으면 정상적으로 성장이 불가능한 난치병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병은 일본에서 8천 명 중에 한 명 꼴로 걸리는 희귀병으로 만일 성장 호르몬제를 먹지 않으면 처음에는 변비 증세가 나타나다가 무릎에 물이 생기고 하체는 성장하지 않으며 머리만 커져 기형이 되며 급기야 생명을 잃을 수 있는 무서운 병이라고 하였습니다.
96년 5월, 우리 부부는 시영이의 병 치료를 위하여 아내와 작정기도를 하면서 준비하여 본교회의 2주 연속 특별부흥성회에 참석했습니다. 처음으로 만민중앙교회에서 들어서자 멀리서 찬양소리가 들려오는데 평상시 눈물이 거의 없던 저의 눈에서 하염없이 통회자복과 기쁨의 눈물이 흘러 나왔습니다. 말씀을 통하여 시간 시간 은혜를 받고 당회장 이재록 목사님의 환자기도시 시영이의 병명인 크레친병을 불러 주실 때 병이 나았다는 믿음의 확신이 왔습니다.
우리 부부는 곧바로 시영이에게 매일 먹이던 성장 호르몬제를 쓰레기통에 버리고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께 모든 것을 맡겼습니다. 그러자 시영이는 정상적으로 성장하였고 몇 개월이 지난 후 주치의인 일본 야마가타대학병원 의사 선생님에게 약을 먹이지 않았다는 사실과 지금까지의 과정을 말씀드리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전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날 진찰 결과 시영이의 호르몬 수치가 정상적으로 돌아왔다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98년 10월, 둘째 아들 대영이가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혈액검사 결과 시영이와 똑같은 병에 걸려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부부는 대영이에게 처음부터 약을 먹이지 않았고 본교회에 가서 당회장 이재록 목사님께 기도를 받으면 깨끗이 나으리라는 믿음의 확신이 있었기에 아무런 염려도 없었으며 평안했습니다. 물론 대영이도 한 번의 기도를 통해 깨끗하게 치료를 받았습니다.
셋째 아들은 딸로 바꿔 주세요
99년, 아내가 셋째 아이를 잉태하였습니다. 일본에는 임신했을 때 부모가 원하면 의사는 합법적으로 아들인지 딸인지 알려줍니다. 아내가 셋째 아이를 잉태하면서 5개월이 되어 병원에 가니 의사는 아들이라고 알려 주었습니다.
그러나 아내는 딸을 간절히 원했습니다. 99년 겨울, 아내는 본교회에 와서 뱃속에 있는 아이가 딸이었으면 좋겠다며 당회장 목사님께 기도를 받았습니다.
"당회장 목사님, 병원에서는 아들이라고 했지만 기도해 주시면 하나님께서 딸로 바꿔 주실 줄 믿습니다."
당회장 목사님께서 웃으시면서 기도해 주셨습니다. 그 후 임신 9개월이 되어 아내가 병원에 가 진단해 보니 딸이라고 하였습니다. 기도하면 뱃속에 있는 아기의 성별도 바뀔 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2000년 5월 셋째인 딸 가영이가 태어났습니다. 현재 시영이와 대영이는 초등학교 5학년과 2학년인데 학교생활에 적응도 잘하고 각 분야에서 뛰어나 선생님의 칭찬도 많이 받고 있습니다.
야마가타 만민교회가 세워지고
잉태의 축복과 난치병인 진주종 중이염을 치료받고 한국에서 돌아온 아내는 그때부터 주변에 당회장 이재록 목사님의 설교 테이프와 책자를 전하며 밤낮 없이 전도와 기도를 쉬지 않았고, 저는 아내를 열심히 도왔습니다.
저희 부부는 우상의 나라 일본에 생명의 말씀이 있는 교회와 성결 복음이 전해져 이곳에 신속히 지교회가 세워지고 영적인 선교사님이 파송되어 오실 수 있도록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그리하여 97년도 7월, 저희 가정에서 주일날 유아를 포함하여 여섯 명이 모여 처음으로 가정예배를 드렸습니다. 그 후에 복지회관 건물을 빌려 전도한 30여 명을 모아 당회장 이재록 목사님의 설교 비디오 테잎으로 주일 예배를 인도하며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이때 멀리 이다시에서 사역하는 류승길 목사님께서 한 달에 한두 번 오셔서 성경공부와 심방을 도와 주셨습니다.
98년 9월, 장강섭 목사님께서 야마가타만민교회에 파송되어 취임하셨습니다.
그 후 창고로 쓰던 허름한 2층 건물을 사택과 성전으로 개조하여 사용하면서 50여 명이 모여 예배를 드렸고 매일 새 성전을 위해 다니엘 철야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1999년 320평의 대지 위에 건평 120평의 성전을 마련하게 되었고, 교회의 안정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믿음으로 고백하는 것마다 응답해 주시는 좋으신 하나님 저는 봉급생활자이었기에 물질적으로는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만민중앙교회를 알게 되면서 온전한 주일성수와 십일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바 은혜에 감사하여 해마다 본교회에 때를 좇아 감사예물 등을 정성껏 심었습니다. 그러면서 2003년 5월에 일본에온 지 13년 만에 2층 단독 주택을 구입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2004년부터는 매월 날짜를 정하여 당회장 이재록 목사님께서 감당하고 계시는 세계선교 사역에 조금이나마 힘이 되어 드리고자 정기적으로 선교헌금을 보내 드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때부터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십일조가 늘어나고 더 큰 물질 축복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2004년 7월이 되면서는 한국에 있는 재일동포 기업에 출자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저는 이것을 통하여 당회장님의 선교 사역에 물질적으로 더 큰 힘이 되기를 원했기에 신속히 이루어져 하나님께 영광돌리기를 간절히 원하며 예물을 심고 축복기도를 받았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짧은 시간 안에 10배 이상의 큰 축복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가장 좋은 시기에 드릴 수 있도록 축복하여 주셨으며 계속해서 더 큰 축복을 받을 수 있도록 모든 것을 형통하게 인도하여 주시고 계십니다. 저는 가정이나 직장, 별도의 개인부업 일 등 마음에 품은 것들마다 모두 현실로 이루어지는 것을 체험하면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너무 크심을 느낍니다. 항상 믿음으로 고백하며 바라볼 때 그 고백대로 이루어 주시는 좋으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불통이 없는 삶, 모든 것이 형통한 행복한 삶으로 인도해 주신 아버지 하나님께 모든 감사와 영광을 돌립니다.
생명의 말씀과 기도로 인도하여 주시는 당회장 목사님께도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일본 야마가타 만민교회. 재일본 대한민국 민단 야마가타현 본부 사무국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1995년 5월, 한밤중에 아내가 곤히 잠자던 나를 흔들어 깨웠습니다."여보, 나 좀 살려줘요. 죽을 것만 같아요!"
아내는 몸을 데굴데굴 구르며 고통스러워했습니다. 놀란 저는 구급차를 불러 병원 응급실에 갔는데 당시는 정확한 병명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당시 저는 야마가타현 민단본부에서 근무하고 있었는데 이틀 후에는 한국으로 출장을 가야 했기에 아내와 함께 한국행 비행기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6년 반 동안 주일(駐日) 한국 센다이 총영사관에서 근무하다가 야마가타현으로 근무지를 옮긴 지 한 달 반인 상태였기에 아내를 맡길만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내는 기내 밖으로 뛰어내리고 싶을 정도로 고통이 심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서울에 있는 언니 집에 머물며 병원에 가서 진단을 받았는데 난치병인 '진주종 중이염'이 악화되어 급히 수술해야 한다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이 병은 귀에서 고름이 나오고 잘 들리지 않으며, 심해지면 균이 귓속의 뼈까지 갉아 먹을 뿐만 아니라 균이 뇌에 들어가면 뇌종양으로 발전하는 무서운 병이었습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중이염을 앓아 온 아내는 이것으로 인해 항상 약을 복용해 왔으며, 귀에서 고름이 흘러나왔기에 냄새로 인하여 주변 사람들에게 폐를 끼칠까봐 항상 염려하였습니다.
이때 부산에 살고 계셨던 장모님이 첫 주간에 외손녀인 박혜상 집사의 전도로 본교회 2주 연속 특별부흥성회에 참석하셨다가 류머티즘성 관절염을 치료받는 체험을 하셨기에 이 소식을 듣고 "만민중앙교회 이재록 목사님께 가면 치료받을 수 있다." 라고 아내에게 권면하여 주셨습니다.
어릴 때부터 신앙생활을 했던 아내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병을 치료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2주 연속 특별부흥성회 둘째 주부터 언니인 최경희, 최남덕 권사님과 함께 만민중앙교회 예배에 참석을 했습니다.
그리고 예배 후에 이재록 목사님을 찾아뵙고 기도를 받았는데 기도받는 순간 몸 전체가 박하향 같이 시원해졌으며 동시에 심한 통증이 사라진 것을 체험했습니다.
그 다음 날부터 2주째 계속된 부흥성회에 참석하였는데 아내는 통회자복을 하면서 방언의 은사도 받았습니다. 그 후 귓속에서는 더 이상 진물이 흐르지 않았고, 두통과 여러 가지 후유증까지도 깨끗하게 치료를 받았습니다.
95년 6월, 일본에 돌아온 아내가 3주 후에 몸에 이상을 느끼고 병원에 갔는데 믿기 어려운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아기를 잉태했다는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91년 저와 결혼할 당시 몸이 약했던 아내였기에 가족들조차 아내에게 아기 가질 생각은 하지 말라고 권면할 정도였습니다.
94년, 결혼한 지 4년째가 되었지만 여전히 잉태의 기미가 보이질 않아 우리 부부는 병원에 가서 진단을 받았는데 의사는 아내가 선천적 심방결손으로 인한 심장병이라면서 아기를 가진다 할지라도 산모와 아이가 다 위험할 수 있으므로 심장 수술부터 해야 한다고 권면했습니다. 수술 후에는 몸이 너무 쇠약한 상태라 3, 4년 동안은 아이가 잉태되지도 않을 뿐더러 설사 잉태된다 할지라도 위험한 상태이므로 아예 출산은 생각도 하지 말라는 진단을 내렸습니다. 그 당시는 본교회를 알지 못하였기에 수술 후 3, 4년 뒤라도 잉태할 수 있으리라는 가능성을 바라보며 심장수술을 받았습니다.
당시 한국에서 돌아온 아내는 심장병 수술을 받은 지 8개월밖에 안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주의 종 이재록 목사님을 통해 보장받는 권능의 기도를 통해 난치병도 치료받았으며 잉태 축복도 받았으니 이 아기는 분명히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확신하였습니다.
그래서 아내는 믿음으로 아기를 낳겠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저는 한편으로는 조금은 불안하였지만 아내가 치료받은 것을 보았기에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자 하였습니다.
뱃속에 있던 아이는 새벽 5시만 되면 힘껏 발로 차서 엄마를 깨웠습니다. 아내는 아무리 피곤해도 그 시간이 되면 일어날 수밖에 없었지요.
아내가 일어나서 찬양하고 기도하면 그 때부터 뱃속이 평안해지곤 하였습니다. 그래서 아내는 새벽 5시가 되면 늘 일어나 기도를 하는 습관을 갖게 되었지요.
희귀병인 크레친 병에 걸려
아내는 96년 3월, 첫아들 시영이를 출산했습니다. 그런데 혈액검사 결과 크레친 병에 걸려 있다는 진단이 나왔습니다. 크레친 병이란 원인을 알 수 없는 '성장호르몬 생성 불능증'으로 몸에서 호르몬 생성이 불가능하여 평생 호로몬제을 복용하지 않으면 정상적으로 성장이 불가능한 난치병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병은 일본에서 8천 명 중에 한 명 꼴로 걸리는 희귀병으로 만일 성장 호르몬제를 먹지 않으면 처음에는 변비 증세가 나타나다가 무릎에 물이 생기고 하체는 성장하지 않으며 머리만 커져 기형이 되며 급기야 생명을 잃을 수 있는 무서운 병이라고 하였습니다.
96년 5월, 우리 부부는 시영이의 병 치료를 위하여 아내와 작정기도를 하면서 준비하여 본교회의 2주 연속 특별부흥성회에 참석했습니다. 처음으로 만민중앙교회에서 들어서자 멀리서 찬양소리가 들려오는데 평상시 눈물이 거의 없던 저의 눈에서 하염없이 통회자복과 기쁨의 눈물이 흘러 나왔습니다. 말씀을 통하여 시간 시간 은혜를 받고 당회장 이재록 목사님의 환자기도시 시영이의 병명인 크레친병을 불러 주실 때 병이 나았다는 믿음의 확신이 왔습니다.
우리 부부는 곧바로 시영이에게 매일 먹이던 성장 호르몬제를 쓰레기통에 버리고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께 모든 것을 맡겼습니다. 그러자 시영이는 정상적으로 성장하였고 몇 개월이 지난 후 주치의인 일본 야마가타대학병원 의사 선생님에게 약을 먹이지 않았다는 사실과 지금까지의 과정을 말씀드리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전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날 진찰 결과 시영이의 호르몬 수치가 정상적으로 돌아왔다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98년 10월, 둘째 아들 대영이가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혈액검사 결과 시영이와 똑같은 병에 걸려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부부는 대영이에게 처음부터 약을 먹이지 않았고 본교회에 가서 당회장 이재록 목사님께 기도를 받으면 깨끗이 나으리라는 믿음의 확신이 있었기에 아무런 염려도 없었으며 평안했습니다. 물론 대영이도 한 번의 기도를 통해 깨끗하게 치료를 받았습니다.
셋째 아들은 딸로 바꿔 주세요
99년, 아내가 셋째 아이를 잉태하였습니다. 일본에는 임신했을 때 부모가 원하면 의사는 합법적으로 아들인지 딸인지 알려줍니다. 아내가 셋째 아이를 잉태하면서 5개월이 되어 병원에 가니 의사는 아들이라고 알려 주었습니다.
그러나 아내는 딸을 간절히 원했습니다. 99년 겨울, 아내는 본교회에 와서 뱃속에 있는 아이가 딸이었으면 좋겠다며 당회장 목사님께 기도를 받았습니다.
"당회장 목사님, 병원에서는 아들이라고 했지만 기도해 주시면 하나님께서 딸로 바꿔 주실 줄 믿습니다."
당회장 목사님께서 웃으시면서 기도해 주셨습니다. 그 후 임신 9개월이 되어 아내가 병원에 가 진단해 보니 딸이라고 하였습니다. 기도하면 뱃속에 있는 아기의 성별도 바뀔 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2000년 5월 셋째인 딸 가영이가 태어났습니다. 현재 시영이와 대영이는 초등학교 5학년과 2학년인데 학교생활에 적응도 잘하고 각 분야에서 뛰어나 선생님의 칭찬도 많이 받고 있습니다.
야마가타 만민교회가 세워지고
잉태의 축복과 난치병인 진주종 중이염을 치료받고 한국에서 돌아온 아내는 그때부터 주변에 당회장 이재록 목사님의 설교 테이프와 책자를 전하며 밤낮 없이 전도와 기도를 쉬지 않았고, 저는 아내를 열심히 도왔습니다.
저희 부부는 우상의 나라 일본에 생명의 말씀이 있는 교회와 성결 복음이 전해져 이곳에 신속히 지교회가 세워지고 영적인 선교사님이 파송되어 오실 수 있도록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그리하여 97년도 7월, 저희 가정에서 주일날 유아를 포함하여 여섯 명이 모여 처음으로 가정예배를 드렸습니다. 그 후에 복지회관 건물을 빌려 전도한 30여 명을 모아 당회장 이재록 목사님의 설교 비디오 테잎으로 주일 예배를 인도하며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이때 멀리 이다시에서 사역하는 류승길 목사님께서 한 달에 한두 번 오셔서 성경공부와 심방을 도와 주셨습니다.
98년 9월, 장강섭 목사님께서 야마가타만민교회에 파송되어 취임하셨습니다.
그 후 창고로 쓰던 허름한 2층 건물을 사택과 성전으로 개조하여 사용하면서 50여 명이 모여 예배를 드렸고 매일 새 성전을 위해 다니엘 철야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1999년 320평의 대지 위에 건평 120평의 성전을 마련하게 되었고, 교회의 안정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믿음으로 고백하는 것마다 응답해 주시는 좋으신 하나님 저는 봉급생활자이었기에 물질적으로는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만민중앙교회를 알게 되면서 온전한 주일성수와 십일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바 은혜에 감사하여 해마다 본교회에 때를 좇아 감사예물 등을 정성껏 심었습니다. 그러면서 2003년 5월에 일본에온 지 13년 만에 2층 단독 주택을 구입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2004년부터는 매월 날짜를 정하여 당회장 이재록 목사님께서 감당하고 계시는 세계선교 사역에 조금이나마 힘이 되어 드리고자 정기적으로 선교헌금을 보내 드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때부터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십일조가 늘어나고 더 큰 물질 축복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2004년 7월이 되면서는 한국에 있는 재일동포 기업에 출자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저는 이것을 통하여 당회장님의 선교 사역에 물질적으로 더 큰 힘이 되기를 원했기에 신속히 이루어져 하나님께 영광돌리기를 간절히 원하며 예물을 심고 축복기도를 받았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짧은 시간 안에 10배 이상의 큰 축복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가장 좋은 시기에 드릴 수 있도록 축복하여 주셨으며 계속해서 더 큰 축복을 받을 수 있도록 모든 것을 형통하게 인도하여 주시고 계십니다. 저는 가정이나 직장, 별도의 개인부업 일 등 마음에 품은 것들마다 모두 현실로 이루어지는 것을 체험하면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너무 크심을 느낍니다. 항상 믿음으로 고백하며 바라볼 때 그 고백대로 이루어 주시는 좋으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불통이 없는 삶, 모든 것이 형통한 행복한 삶으로 인도해 주신 아버지 하나님께 모든 감사와 영광을 돌립니다.
생명의 말씀과 기도로 인도하여 주시는 당회장 목사님께도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